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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느낌적 느낌'한 예술, 예술에서의 글쓰기

서동진 | 계원예술대 융합예술과 교수
2016-08-12 | VIEW 2264

아마 역사상 어느 때보다 지금처럼 ‘문서작업’을 많이 해야 하는 시절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무정부주의자 가운데 한 명인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최근 국내에도 소개된 『관료제 유토피아』란 저서에서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문서작업의 하중에 시달리는지 고발하고 불평한다.




비판의 기원


그가 격앙된 목소리로 비난하는 신자유주의적 관료제(그가 말하는 신자유주의란 곧 작은 정부라는 세간의 믿음을 거스르기 위해 어깃장을 부리는 것이다.)의 핵심은 끝없는 문서작업일 것이다. 예술가용 자기계발서 패러디 버전인 『현대미술 스타일 매뉴얼Manual of contemporary art style』에서 비평가 파블로 엘구에라(Pablo Helguera)는 예술가 역시 문서작업의 달인이 되지 않고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며 능청스레 가세한다. 그럴 만도 하다. 내 주변의 작가나 전시기획자만 봐도 그렇다. 기관의 공모는 작가의 절대 밥줄이 되어버렸고 이를 무사히 완수할 요량이라면 그들은 숱한 문서작업을 해치워야 한다. 게다가 한참 인기몰이를 하는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 혹은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artist run space)’, ‘신생 공간’ 운운의 새로운 미술제도 형태도 작가들이 자기 생각을 제시하고 공표하고 선전하는 일에 전에 없이 열심히 나서야 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역시 문서를 다루는 일이다. 어쨌거나 그림을 그리든 영상작업을 하든 퍼포먼스를 하던 그/그녀는 워드프로세서를 끼고 살아야 하는 셈이다. 나아가 전시와 공연을 홍보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얻어내는 데 있어 필수 도구가 되어버린 ‘소셜미디어’에 수시로 글을 올려야 하는 사정까지 헤아려보면, 오늘날만큼 예술가나 작가에게 많은 글을 쓰도록 요구하는 시대도 달리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예술가의 글쓰기가 폭발적인 인플레이션인 반면 비평적 글쓰기 성적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초라하다. 실용적이거나 사적인 용도의 글을 쓰는 게 아니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적어도 한때는 공적 공간-비판이론가들이 내세운 유명한 개념을 빌자면 공론장(public sphere)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또 그렇게 나온 글은 곧 비판(critique)을 뜻했다. 저자가 굳이 지식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성행하는 말과 글은 비판이나 비평이 아니라 ‘의견(opinion)’ 혹은 정보 따위에 가깝다. 비판이라는 말의 쓰임새를 살펴보면 사정은 드러난다.

비판이란 고작해야 시사토론 같은 데서 여당파와 야당파, 지지파와 반대파 따위로 구분하고 그렇게 적당히 배분된 논객들이 자기 의견이 낫다는 점을 설득하기 위해 벌이는 입씨름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비판이라기보다는 의견에 가깝다. 아니라면 검색엔진을 통해 마주치게 되는 정보이거나. 의견은 말 그대로 한 사회 혹은 공동체 안에 분포된 생각이나 주장을 가리킨다.

거칠게 말하자면 의견이란 이미 주어진 생각과 견해들을 가리킬 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고 캐묻지 않는다. 의견은 마치 여론조사를 통해 수집되고 집계된 관념들, 그리고 그것이 가리키는 사실들의 세계를 대신할 뿐이다.

예술에서 비평 혹은 비판의 기원은 제법 잘 알려져 있다. 미술사가나 평론가들은 18세기 초반 프랑스 파리의 살롱을 드나들던 이들이 쓴 글에서 미술 비평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최초의 미술평론가들은 ‘공적인 방문자(public visitor)’라는 관점을 택하고 글을 썼다. 이는 감식안을 갖춘 개인적인 감상자의 의견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독자들 역시 자신을 공중(public)으로 생각하며 비평이 건네지는 작품들과 전시에 관해 생각해야 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공중이란 부르주아-남성을 가리킬 뿐 노동자계급과 여성을 비롯한 다른 사회집단은 빠져있다. 그렇다고 해서 비평적 글쓰기가 위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허구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공중의 관점을 빚어내는 비평은 자신이 공중의 입장에 서서 말하는지를 항상 의심받고 비판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평이 과연 온전히 공중을 대변하는지 묻는 비평 사이의 각축을 우리는 토론이나 논쟁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비판 혹은 비평 이후의 예술?


그렇지만 오늘날 비평이나 비판의 글쓰기는 거의 맥을 추지 못한다. 비평은 명사(celebrity)와 다르지 않은 인물이 되어버린 예술가의 개인사를 시시콜콜 다루는 일로 전락한 듯 보인다. 작품은 곧 작가라는 착각은 자아와 그의 자기실현을 숭배하는 동시대 문화의 괴력을 참작한다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연중무휴로 열리는 블록버스터 전시는 위대한 개인으로서의 예술가를 조명하는 데 혈안이다. 모네, 샤갈, 피카소 등 예술가라면 모름지기 위대하고 탁월한 예술가-인물(personality)이라는 형상으로 곁에 찾아온다. 이때 그들은 전무후무하게 탈정치화 되고, 그들의 작업을 에워싼 역사적인 이념에 따른 결정에서 완전히 벗어난, 특출한 개인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블록버스터 전시에만 해당되는 일일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름난 스타들을 망라하는 페어 방식의 전시형태는 제법 진보적인 생각을 내건 전시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할 포스터(Hal Foster)라는 비평가가 즐겨 쓰는 용어를 참조하자면, 이는 ‘비판-이후(post-critical)’의 시대에 예술가 정체성이 어떻게 세상에 모습을 갖추는지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물론 명성과 인기가 예술가와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세계에서 가십과 추문이 그에 관해 쓸 수 있는 글의 전부인 듯 보이는 것은 괴이한 일도 아니다. 비평적 글쓰기가 작가론을 제외하면 자리할 곳이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오늘의 추세에선 당연한 순서이다. 마치 신인상을 수여하는 대중음악이나 영화에서의 경연(競演)처럼 젊은 작가, 신세대 작가 운운의 휘장 아래 작가들을 선별하고 비교하며 순위를 매기는 세태 역시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호의와 감탄과 힐난, 거부를 연발하는 글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비평 혹은 비판으로서 글이 희박해질 대로 희박해지는 세계가 자리한 것을 우울하게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가 생겨난 혐의를 비평에 전가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러한 비판의 위기 혹은 몰락을 가져온 가장 큰 이유는 예술 자체의 편에서 찾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마 이는 내가 '느낌적 느낌한 예술'이라 불러도 좋을 작품들이 어느 곳에서나 넘쳐나는 사정을 통해 헤아려볼 수 있다. 알다시피 언제부터인가 읽기(reading), 해독(decoding)을 말하는 대신 감각이나 느낌을 내세우는 작품이 늘어나고 덩달아 재현이란 개념 대신에 정동(affect)이나 감정 같은 개념이 비평에서 부쩍 늘어났다. 이를테면 우리는 좋았던 그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이미지를 읽고 사유한다는 말을 하는 대신 이미지를 느낀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해지는, 그리고 이데올로기나 신화, 담론으로서 이미지를 따지는 일 대신에 이미지로부터 어떤 감정과 정동(혐오, 수치, 공포, 연민, 공감 등등)을 느낀다고 말하는 것이 더 가치 있고 의미심장해 보이는 시점에 이르렀다.

김병규, 공간이동 하다가 벽에 박혔어(부분), 2016

김병규, 공간이동 하다가 벽에 박혔어(부분), 2016


김병규, 공간이동 하다가 벽에 박혔어(전면), 2016
김병규, 공간이동 하다가 벽에 박혔어(전면), 2016 l 사진출처_넌 벽에 박혔어, 2016. 7. 15 - 8. 6, YOU GOT STUCK IN THE WALL, 안옥현&김병규, 갤러리 룩스


얼마 전 갤러리 '룩스'에서 열린 안옥현, 김병규의 2인전 <넌 벽에 박혔어>에 갔었다. 마침 어느 사진잡지에서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글을 주문해 짧은 원고를 쓴 뒤였다. 글에서 나는 오늘날 사진은 더 이상 세계를 표상(representation)하는 것으로 다루지 않고 감정의 매체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고 진단하면서, 이는 사진이 비판적 이미지로서 구실을 할 수 있는 힘을 빼앗긴 것 같다는 걱정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전시노트에서 작가 역시 비슷한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내게 눈에 들어온 대목은 이런 것이었다. “감정. 새삼 내가 감정을 얘기하자고 하는 게 어쩐지 하찮으며 불필요한 듯 여겨진다. 그러나 오늘날의 감정이란 것은 과대평가되면서 대량생산되고 과잉 되며, 그것은 또한 포르노처럼 전시되고 빠르게 소비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감정은 그렇게 역설적으로 잊혀져 가고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감정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 혈안인 세태를 예리하게 감지하고 있다. 작가의 과격한 말처럼 감정은 ‘포르노’처럼 전시되고 소비된다. 작가는 몇 가지 감정으로 분류, 처리, 가공되어 쏟아지는 감정-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구역질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표준화된 감정, 희로애락 혹은 신경생리학자들의 허장성세를 따르자면 크게 11가지로 분류될 수 있을 상투적인 감정의 생산과 소비의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는다. 진정성이 온전히 새겨진 감정을 희구하는 일은 예술의 역사에서 드문 일은 아니다.




멜로 이후의 감정

감정을 뻔하게 주조하고 소비하는 일은 한때 경멸적으로 멜로라고 불렸지만 이제 멜로는 TV드라마나 영화의 장르에 한정된 일이 아니다. 아마 가장 흥미롭고 고약한 사례는 애완동물 같은 주인공을 내세운 TV 프로그램들일 것이다. 이를테면 학대 받아 다리를 저는 개의 낯을 클로즈업하며 그 위로 더할 나위 없이 애틋하고 뭉클하게 사람의 목소리를 더빙하며 감정이입을 촉구하는 TV쇼는, 여느 대상에나 감정을 투사하고 그를 체험하도록 몰고 가는 동시대의 윤리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준칙을 요약한다. 그리고 이는 거의 모든 곳으로 확장된다. 국제자선기구나 구호단체의 광고 캠페인은 내전과 독재, 착취라는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표백한 채 창백하고 무력한 피해자의 모습과 마주하도록 촉구한다. 화면을 채운 난민 소년의 모습은 이미지라기보다는 감정적 반응을 위해 조직된 하나의 감정의 조각 그 자체와 같은 것으로 둔갑한 듯 보인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그 차이를 막론하고 어느 정치 캠페인에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감성이나 감정 자체임을 자처하는 상품들에 곁눈질 해보면 감정의 지배라는 사정은 더욱 완연해진다. 물질문화의 세계는 점점 더 감성적인 것으로 휘발되어 버리고 사물은 그 자체 감정적인 대상인 듯 현상한다. 한때 유별난 수집가들이나 하는 짓처럼 보이던 사물을 감정화하는 몸짓은 이제 모든 상품으로 확장된다. 이를테면 일본말인 ‘굿즈(グッズ)’를 떠올려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낱말은 더 이상 재화나 상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물을 총칭한다. 어느 회사가 만든 주머니칼과 병따개, 반바지, 치즈, 연필, 수첩 따위가 큐레이팅 되어 전시되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갖가지 감정에 호응하도록 하는 것은 오늘날 소비문화의 흔한 풍경이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의 전시나 공연을 떠올리면 이는 예술적 실천 안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일임을 상기할 수 있다. 그것이 숭고함이라는 뻔뻔한 미학적인 범주를 참조하는 것이든 아니면 영성(spiritual)을 흉내 내는 것이든, 관객에게 어떤 감정의 자장에 들어오도록 주문하고 그러한 감정에 참여하도록 주문하는 것은 상투적인 일이다. 이를테면 극장이나 전시장, 특정 장소의 물리적인 구조나 장치, 조명 등을 정밀하게 드러내면서 관객에게 장소의 물질성을 느끼도록 요청한다는 작품들은 거의 의도와는 달리 감정에 호소한다. 그것은 장소를 물질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장소들을 인격적인 주체처럼 불러낸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흔히 보던 유령의 집(haunted house)이 마치 인격체처럼 오싹하고 섬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작업이 주워섬기는 물질성의 실상은 정반대 작업에 가깝다. 그것은 물질성을 탈물질화하면서 오늘날 극단적으로 탈물질화 된 상품의 세계에 살아가는 주체를 흉내 낸다. 사물은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고 감정을 담는 사물이 된다. 최신 미학이론이나 예술이론이 객체(object)라는 개념을 맹공하며 물(物, thing)이라는 개념을 추켜올리는 것도 그런 배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바야흐로 느낌적 느낌한 예술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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