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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운동으로 운동하다

한은형 | 소설가
2016-11-17 | VIEW 860

베를린 아트신에 대한 첫 번째 글을 베타니엔 갤러리로 시작하는 것은 베타니엔 갤러리라는 공간이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 때문이다. 나는 베를린에 가기 전부터 이곳을 알고 있었는데, 베를린에 머물면서 관련한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고, 방문하고 나서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베를린이라는 도시와 베타니엔 갤러리는 묘하게 닮아 있기 때문이다. 베를린은 전쟁과 파괴, 분단, 그리고 다시 통일을 겪은 곳이고, 이 베타니엔 갤러리라는 곳은 그러한 베를린의 파란만장함이 새겨진 ‘작은 베를린’이라고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일단, 여기는 간호학교 겸 병원으로 설립되었다. 특이한 점은 모든 학생들이 모두 수녀였다는 것. 1845년이다. 그러니까 병원이자 학교이자 수녀원이었던 셈. 1848년에는 『에피 브리스트』의 작가 테오도로 폰타네가 이 병원의 약국에서 일했고, 베를린 혁명이 일어났다. 실패한다. 하나의 독일을 원했지만, 연방제로 남았다.(이 갤러리의 역사는 베를린의 역사이기도 해서 베타니엔의 역사와 베를린의 역사를 같이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1869년, 900명 이상의 환자가 감염으로 죽었다. 1941년, 게슈타포가 차지. 1943년, 폭탄으로 파괴. 1966년, 경영 악화. 1968년, 철거 계획. 1969년, 반대 데모. 1970년, 베를린시에 건물 매각. 그러나 이곳은 ‘스쾃’된다.

스쾃squat. 점거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특별한 것은, 스쾃이 불법 점거를 가리키는 말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예술 운동’ 중 하나로도 여겨지고 있어서다. 돈이 없어서 건물을 점거하는 사람들도 있고 정치적인 의도로 건물을 점거하는 사람들도 있고, 때로는 그 둘이 섞이기도 할 것인데, 베를린은 이 ‘스쾃’이 유난히 활발히 일어나는 곳이라고 베를린 사람들은 말했다. 베타니엔 갤러리도 점거되었고, 그리고 점거한 이들의 의도가 관철된다. 그러니까 그들의 승리. 1973년, 병원이었던 베타니엔은 문화공간으로 재개관한다. 쿤스트라움 크로이츠베르크 베타니엔. 그리고 하나의 베타니엔이 더 있다. 전 세계 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쿤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스투디오. 이 두 베타니엔은 도보로 20분쯤이 걸리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나는 이 특별한 베타니엔에서 올해 8월에 흥미로운 전시를 봤다. 〈conteS/Xting sport 2016〉(7.9~8.28). ‘/’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 보면 이 전시가 무엇을 하려는 전시인지 감이 오기 시작한다. 스포츠에 관련된 ‘콘테스팅’과 ‘콘텍스팅’. 시합과 맥락, 시합의 맥락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전시다. 나는 여기서 축구를 하는 여자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여자들, 무지갯빛 깃발, 트랜스젠더 운동선수, ‘퀴어 스포츠 위켄드’라는 포스터, 여성이라는 신체적 특성을 부정하며 남자처럼 몸을 키운 여자, 걸 그룹의 댄스를 모방한 춤을 추는 유니폼을 입은 세 남자 등을 보았다. 그러다 보면 이 전시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힘들어진다. 이 전시는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목적에 철저했다. 그러니까 ‘운동(sports)’에 대한 전시를 통해 ‘운동(movement)’을 전개하고 있었다. 나는 이 점이 베를린스럽다고 느꼈다. 베를린에서는 워낙 게이 페스티벌과 페티시즘 페스티벌 같은 것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그곳에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현장의 활기와 즐거움을 전해 들었었다.



(왼) 남성스러운 스포츠 중 하나인 럭비의 이미지를 비튼 작품
(중앙) 권투하는 여성의 이미지
(오) LGBT 상징인 무지개를 활용한 이미지들




베타니엔의 이 전시를 보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운동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 세계에 살아왔는지 새삼 자각하게 된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性)에 대해서, 그 성에 주어졌다고 생각되었던 성역할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도 남성도 아닌 성이 있다는 것, 여성이었던 사람이 남성이 되길 원할 수도 있고 남성이 여성이 되길 원할 수 있다는 것도, 그러면서 여전히 본래의 성역할을 고수할 수 있다는 것도. 단지 ‘여성’과 ‘남성’만으로 분류하기에 인간은 얼마나 복잡하고 서로가 다른지에 대해서도. 전시 안내서에 있는 것처럼 “차별에 도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해방을 고취하기 위해서” 이런 ‘운동’들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성해방’이라는 말이 쓸모가 없어질 때까지, 동성결혼이 합법화될 때까지, 우리와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을 때까지. 이 당연한 말을 쓰고 있으려니 지루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여전히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글_한은형
소설가.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2015년 장편소설 《거짓말》로 한겨레문학상 수상. 소설집으로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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