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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에 묻다] 최소의 건축, 21C의 매니페스토

송하엽 | 아트뮤 편집위원
2016-07-13 | VIEW 2862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최소주의’로 번역하면 역사적 뉘앙스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 미니멀리즘은 장식과 구상을 줄이자는 모토 이후에 하나의 명확한 양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미니멀리즘의 등장 이전인 1932년 이미 'Existenz Minimum (Minimum Dwelling)'에서 ‘근대건축에서의 최소의 주거’가 발표되었다. 이 매뉴얼에 의해 독일권 근대 거주의 최소한의 기준이 마련되어 공동주택과 단독주택이 만들어졌다.

미국에서 2차 대전 후에 만들어진 많은 소셜 하우징은 현재 재건축 되고 있다. 근대건축의 실패라고 일컬어지는 ‘프룻 이고(Pruitt–Igoe)’ 아파트의 폭발해체(1972)는 스타일 보다 다른 문제가 있었다. 주택경기 저하, 인종차별적인 단지배치, 개개 유닛의 작은 공간, 그리고 빈민화에 따라 기본적으로 가족이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 침실과 화장실은 비좁고 미국의 도메스틱한 라이프스타일에 맞지 않는 평면도가 그 이유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저렇게 비좁은 데 살았나 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도 재개발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저평수 규모의 아파트라야만 가능할 정도이다. 물론 소셜 하우징과 공동주택은 표준화되어 그 이전의 주거형식보다 진보한 건 틀림없다.

2000년대까지 아파트 광풍의 위력 아래 집은 부의 축척의 수단이었고, 지금은 거품이 걷혀 좀처럼 집을 사지 않는 풍조이지만 여전히 집은 소유의 대상이다. 이런 상황에 집의 형태나 평면보다 중요한 것은 위치이다. 학군이 안 좋은 곳의 큰 집보다, 학군이 좋은 곳의 작은 집이 더 비싼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다. 이런 상황은 비즈니스를 위한 건축가도 두 그룹으로 갈라 놓는다. 아파트 단지를 설계하는 사업형 건축가그룹과 작은 대지의 건물을 설계하는 아틀리에형 건축가. 건축비즈니스는 양분되어 도시를 짓고 있으며 무미건조한 아파트에 변화를 주기 위해 아틀리에형 건축가를 큰 아파트단지를 설계하는 일에 초빙하기도 한다.

최소의 집 1회 전시 포스터, 2013
최소의 집 1회 전시 포스터, 2013


정영한 건축가의 기획으로 2013년부터 올해까지 매해 두 번씩 진행된 ‘최소의 집’의 전시는 작은 집의 설계도를 소개하고 있다. 작은 집을 주거의 요구와 대지의 특성과 맞게 설계한 개개인 건축가의 해결에 대한 공유이다. 최소의 의미는 크기 않은 정도라는 의미로 그 뉘앙스는 무언가 딱 맞고 소박하며 간절하다는 뜻이다. 집을 부동산의 가치로 교환하기 위한 공간으로 보기보다는 한 가족이 장악하며 또한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보는 것이다.

최소의 집을 승효상 건축가가 1996년에 출판한 <빈자의 미학>과 어떻게 견줘볼 수 있을까? ‘빈자’와 ‘미학’은 상충 되는 말로서 그 때문에 건축가의 진의가 지금까지도 논의가 되고 있다. 그러나 빈자는 실제로 가난한 사람이 아닌 가난할 수 있다는 뜻으로 세상의 발전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용기로 볼 수 있다. 공간을 수익성이 흘러가는 자본으로 보는 입장과 다른 가치를 좇는 건축가 그룹은 우리가 아는 선에서 정리 될 수 있다. 보통 네덜란드인은 거래에 강한 인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도 알도 반 아이크(Aldo Van Eyck)와 같은 SAVAGE(쿨 가이)가 있었다. 반 아이크는 그의 글 ‘Rats and Great Gangs’에서 쥐와 같은 건축가와 예술가 그레이트 깽과 같은 소위 강단이 있는 건축가를 구분한 적이 있다.

그의 분류에 따르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같이 애리조나에서 머물며 대도시에 좀처럼 가지 않고 큰 건물설계에 연연하지 않는 건축가는 그레이트 깽이라 할 수 있다. 몬드리안과 같이 자연현상을 고집스럽게 절대 추상화한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물론 반 아이크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건축가, 예술가의 개인적인 레벨의 작업과 관련된 실제 에피소드도 많이 알고 있어서 이러한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건축가가 권력과 자본의 시녀같이 프로젝트를 쫓아 다니는 경우는 쥐와 같은 부류로 분류하였다.

도시에 살면서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유지하고,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축가를 종종 볼 수 있다. 더 이상 부자를 위한 건축을 하지 않겠다는 일본 건축가 시게루 반, 학교와 박물관 등을 통해 오래된 중국문화를 계승하는 중국 건축가 왕수, 가난한 가정을 위해 개인이 덧붙일 집의 여지를 만드는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 루럴 스튜디오(Rural Studio)라는 학교수업을 통해 가난한 이들의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어왔던 사무엘 모카비 교수, 기존의 폐시설을 동네의 새로운 커뮤니티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어셈블 스튜디오(ASSEMBLE) 등등.

상위 1% 도 안되는 슈퍼 리치들이 각국의 경제지수의 실제적인 현실을 가리는 현대 사회에서 야인의 자세를 지닌 건축가들의 작품의 변화와 행보는 건축이 심미적으로 즐기는 대상을 넘어 사람들의 실제적 생활에서 물질적, 정신적 공유까지 추구한다. 1%를 제외한 99%가 같은 배를 탄 피해자가 아니라, 그 1%까지 삶의 방향을 다른 99%를 위해 돌릴 수 있는 노력인 것이다.

‘최소의 집’은 그 동안의 전시를 통해 최소, 빈자, 은둔자, 아이 없는 가족, 반려동물이 있는 집, 아이 있는 평범한 집안 또한 은퇴한 부부까지 두루두루 포함 되었다. 작지만 아파트와 집장사의 집과는 다르게 맞춤형으로 만들어진 생활공간에 대한 추구가 있는 집에 대한 이야기다. 그 아래에 흐르는 공통점은 뭐랄까, 허세가 없는 집이다. 미학적으로 강요하는 공간보다는 단출한 집의 모습으로 집안에서 생활이 읽히는 집이다. 친한 이들이 손쉽게 찾아올 수 있는 집, 작은 집이지만 땅에서 서성이며 조우할 수 있는 한 평의 마당이라도 있는 집, 집안에서 공간경험을 극대화하는 곳.

정방, 김희준 (사진, 김용관), 2013
정방, 김희준 (사진, 김용관), 2013


“건축물은 심성을 변화시키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공간이 인간을 사유케 하고 그래서 좋은 공간에 살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공간에 살면 나쁜 사람이 되겠지요. 수도하는 사람이 암자를 찾는 것도 작고 검박한 공간이 자신을 바꿔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거든요.” (승효상, 서울신문 인터뷰, 2013)

"예전엔 짓는 것만 신경 썼는데 요즘엔 건물도 '잠재적 폐기물'이란 생각을 하게 돼요. 허무는 순간 거대한 쓰레기 더미가 되니까요. 오래가는 건물을 짓는 게 미래 세대를 위한 건축가의 책무라 봅니다." (김인철, 조선일보 인터뷰, 2016)

“집은 인문학적인 겁니다. 사회적 현상과 환경의 변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 나라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죠. 따라서 집을 보면 그 나라의 문화를 알 수 있어요. 이제는 집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영한, 한국경제매거진 인터뷰, 2014)


승효상의 ‘비움’, 김인철의 ‘없음’, 정영한의 ‘최소’에 대한 강변은 사변의 시작과 뉘앙스는 다르지 않다. 크게 보면 불필요한 재화를 사들이는 데 돈을 쓰지 말자는 이야기이다. 물론 필요한 차도 살 수 있고, 입고 싶은 스타일의 옷이나 장식품도 살 수 있으며, 공간을 장식하는 적절한 골동품도 무리해서 살 수 있다. 그러나 공간구성에 있어서 서로 소통하지 못하거나 혹은 완벽히 닿지 못하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공간을 기피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가난하고, 한 미디어 아티스트는 작품을 만들면 만들수록 빚만 진다는 현실도 있지만, 건축가도 건축 작품을 생산해내는 인력시스템과 협력업체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틀리에형 건축가가 생각하는 가치는 사업형 건축가적인 설계에서 유지할 수 없으므로, 돈보다는 공간구성에 치중하는 것이다.

‘최소의 집’ 전시가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6개월마다 3명의 건축가가 새로운 작업을 가지고 등장하는데 그 새로움은 건축저널의 표지를 장식하는 새로움보다는 사는 방식에 대한 진실한 솔루션을 던지는 이른바 시인 건축가의 드러냄이다. 말로 다 설명이 되지 않는 한 존재의 시간을 잠깐 담아두는 집을, 건축가가 페르소나를 증폭시키기 위해 만드는 공간의 묘미를 같이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최소의 의미는 잠재적이다. 비움과 없음이 약간은 강제적인 또는 정치적인 멘트라면, 최소의 의미는 최대의 반대가 아닌 포용적인 의미이다. 2010년대의 건축가들이 소박하게 주장하는 스며드는 매니페스토이다.

Gable Box, BAU 건축, 2012 (건축가가 디자인하고 주인이 지은 집)
Gable Box, BAU 건축, 2012 (건축가가 디자인하고 주인이 지은 집)


이번 전시에서 필자의 관심을 잡아 끈 것은 ‘건축가가 디자인하여 주인이 직접 짓는 집’이다. 최근의 신생기업들이 새로운 생산물을 오픈소스로 설계도를 공개하는 세계적 분위기와 더불어 또한 칠레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의 ‘절반의 집(Half of Good House)’에서 집 틀만 건축가가 디자인하고 남는 부분은 집주인이 만드는 것처럼, 박공형의 DIY하우스를 프로토타입화 하는 것이다. 많은 건축가들이 프로토타입, 즉 반복 가능한 원형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왔지만 번번히 기술투자비용과 보급의 한계에 의해 막혀왔다. 하지만 도시에 살면서 주말이 되면 도시에서 벗어나는 삶이 확산되며 유지관리가 편한 작은 집이 선호되는 현상을 보면 최소의 집도 가능할 것이다.

단순히 ‘1억으로 집 짓기’와 같은 이슈가 아니라 건축가의 아이디어가 필요하며, 건설에 있어서도 새로운 생태계가 잉태되어 집주인도 개입하는 삼박자가 맞아 들어가는 메커니즘에 대한 도전으로 모두가 적정성을 추구하는 최선이 바로 최소의 집이 아닐까? 최소의 집은 미학이기 전에 미학을 잉태하고 건물로 낳는 시스템을 건강하게 만들며 건축가의 매니페스토로 남기 보다는 익명의 공간주권을 회복해주는 계기로 자리잡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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