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CA

[SCENE] 질 바비에 전시 비하인드 스토리

2016-05-10 | VIEW 774

기억 중에서 기억이 아닌 것이 있다. 음? ...1)

나는 어느 자리에선가 기억의 불확실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망각에 상상력을 더한 게 기억이라고. 그러고는 보르헤스가 말했다고 덧붙였다. 나는 왜 굳이 보르헤스를 내세웠나?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내가 생각한 것처럼 말하는 게 내키지 않았고, ‘권위에의 호소’를 하고 싶기도 했고, 내가 이런 문장을 기억하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을 은근하게 자랑하고 싶었을 거다. 그러나, 틀렸다. 보르헤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기억에 망각을 더한 게 상상력이라고 했다.2) 이런! 기억의 불확실함에 대해 말하려다 내 기억의 불확실함에 대해 말하게 된 셈이다.

망각+기억=상상력(보르헤스의 발언)
망각+상상력=기억(나의 기억)

기억이라는 것의 불확실함을 보여주는, 개인적이면서 우스꽝스러운 사례를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하면 위와 같다. 꽤 흥미롭지 않나? 둘 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그것은 기억과 상상력을 치환해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을 발견해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 주장하고 싶은 거다. 기억과 상상력은 결국 같은 게 아닌가? 혹은 비슷한 게 아닌가? 나는 한 프랑스 작가의 전시 프리뷰를 보다가 이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그래서 이렇게 적을 수밖에 없다.



그 프랑스 작가는 질 바비에다. 그는 1965년 바누아투에서 태어났고 20세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왔고 현재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작업하고 있다. 질은 2016년 4월 12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프리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통역사가 이렇게 옮겼다.)

“추억을 떠올리면서 인간은 기억을 만들기도 하고 해체하기도 합니다.” 사통팔달로 뻗쳐 있는 그의 다종다기한 작품들이 결국 기억에 대한 문제로 귀결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기억은 무엇인가? 기억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기억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혹은 어떻게 재구성되는가? 등등의.

그렇다면 질은 기억을 어떻게 다루는가. 일단은 언어다. 언어에 대한 지독한 애정을 통해 자신의 기억에 접근해서 인상과 경험을 간직하거나 끄집어낸다. 이렇게! 라루스 사전을 필사하고(1992년에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블랙 데생>이 일기장 혹은 소설과 비슷한 거라고 말하고, <인간 주사위에 관한 여섯 가지 단편 소설>이라는 전시를 열고, ‘인간 주사위’는 루크 라인하르트의 동명의 소설에서 이름을 따왔고, 작품들에 말풍선을 달고, ‘단어의 묘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을 내세운다. 작가 자신을 본 딴 작은 모형을 만들고 알로하셔츠나 드레스, 광대옷을 입혀서 정체성을 드러내거나 아예 작정하고 마법사, 교황, 원시부족민처럼 보이게 옷을 입힌다. 체스의 졸(卒)을 가리키는 <체스 졸 Pawn> 시리즈다. 그런데 이것들은 하나같이 플립플랍을 신고 있다. 왜 다 쪼리를 신고 있나? 이에 대해 질은 이런 식으로 말했다. “내가 자란 바누아트는 남태평양에 있는 섬이다. 바닷가에서 놀다보면 늘 쪼리가 떠내려 오고는 했다. 10년 넘게 떠돌다 도착한 쪼리도 있었다.”

나는 그가 여기까지 말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쪼리를 ‘뭐의 상징이다’라거나 ‘뭐를 대변한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게. 그건 보는 사람의 몫이다. 보는 사람은 자신의 상상력으로 기억을 재구성하거나 해체하면서 만든 사람의 상상력과 기억을 헤집어보는 거다. ‘꼬인 이야기로 된 세계’를 가진 사람이 ‘꼬인 이야기로 된 세계’를 만나는 거다.

질은 기억을 재구성하는 게 ‘상처’이고 ‘고통’이며 ‘치유’라고도 말했다. 어떤 말할 수 없는 기억과 상처와 고통이 그를 예술가이게 하지만 예술을 하면서 치유 받는다는 말일 거다. 보는 사람도 치유 받는다면 좋겠다. 그저 그런 치유가 아니라, 각자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는 그런 일을, 그래서 그것을 재구성하거나 해체하고 그러기를. 그것이 우리가 예술을 하고 예술을 보는 이유일 테니까.



1) 질 바비에의 작품명 <축축한 물질 중에서 축축하지 않은 물질이 있다. 음?…>에서 차용 함.
2) 보르헤스, 윌리스 반 스톤, 『보르헤스의 말』, 마음산책, 2015



<에코시스템: 질 바비에>전 설치 비하인드 컷


<에코시스템: 질 바비에>전 설치 비하인드 컷



글_한은형
소설가.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2015년 장편소설 《거짓말》로 한겨레문학상 수상. 소설집으로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가 있다.

  • 페이스북
  • 트위터